“좋은 소식이 좋은 소식이 되려면” (눅 4:21-30) 02/03/2019
오늘도 거룩한 날의 창조주 되신 주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심에 감사하며,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두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에는 세 종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의 이야기 (my story)와 당신 (your story)의 이야기 그리고 진리의 이야기 (true story)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식도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좋은 소식 (good news)과 나쁜 소식 (bad news)그리고 거짓된 소식 (fake news)입니다.
“보는 것만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더 이상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가짜 뉴스가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2018년에 우리를 현혹시킨 10대 뉴스를 찾아 보니 거의 다가 정치적인 과대 포장된 뉴스들이었습니다. 거짓된 소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못 인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정보를 말합니다. 그 거짓된 뉴스들을 “선동,” “거짓 정보,” “거짓말”등의 이름을 붙입니다.
지난 주에 몇 가지 나쁜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엘름우드 파크에 미국에서 유명한 “마칼”이라는 휴지 공장이 전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카고에는 혹한으로 동사한 사람들의 숫자가 21명이나 되었다고합니다. 그 외에도 우리 주변에 나쁜 소식이 너무나 많이 전해집니다.
여러분들 중에 좋은 소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나요?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좋은 소식 중에 좋은 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의,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의 말씀을 메시야의 좋은 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소식일 수 있지요. 너무 좋은 소식이기에 거짓된 소식이 아닐까라고 의심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모든 소식이 예수님에 관한 소식이기에 정녕코 좋은 소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좋은 소식이요 그 좋은 소식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그 복음을 듣고 나에게 주어진 소식으로 받아들여 나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의 들음으로 이루어졌느니라”고 선포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해 전에 장례식장 지배인이 저에게 전화하여 갑자기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하여 장례식을 급히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그리하겠노라 하고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지배인이 그 할아버지의 가족이 모두 유대인들이라 장례식 도중에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당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례식을 시작하며 그 유대인 가족과 친지들을 위하여 그 장례식을 복음의 진리와 믿음에 부끄럽지 않게 인도할 수 있도록 길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식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이 동네에 있는 연합감리교회의 담임목사이며 나의 장례 예배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지합니다. 제가 바라고 기도하는 바는 제가 전하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의 은혜와 예수님 이야기를 당신들의 언어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가족들 대표 여러명이 저에게 다가 오길래 저는 자기들의 부탁을 저버리고 예수님 이야기를 했다고 소리지르고 난리를 치지않나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저의 설교가 얼마나 슬픔을 당한 모든 가족들에게 위로가 되고 마음에 감동을 주었는지 말로 다할 수 없어 기족을 대신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매 주일 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제가 바라고 기도하기는 여러분들 모두가 그 복음을 바로 듣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여 복음이 여러분들에게 참된 좋은 소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둘째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인 예수님이 우리에게 좋은 소식 되신 것에 대한 감사를 잃지 말아야합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고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 고침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열 명 중에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라고합니다. 그를 보며 예수님은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시어 그에게 복음이 구원으로 이루어졌음을 선포합니다.
며칠 전에 성도님들 중 한 분이 “유카리스트”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 메일에,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혹은 적은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 얼마나 많이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가진 것은 많지만 감사에 가난한 사람은 인생을 가난한 자로 끝낸다. 그러나 가진것이 가난한 자일지라도 감사함에 부요한 자는 인생의 끝을 부요한 자로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합니다.
“메시야가 여호와께 감사드리던 그 떡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떡을 들고 축사하시고 또 감사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저주를 축복으로, 그리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유카리스트’의 능력은 감사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셋째로, 우리가 고난과 고통을 당할 지라도 오직 부활의 능력을 믿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모든 삶의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복음입니다.
두 주전 1월 20일에 에스더라고 하는 12살의 어린 소녀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카고 매일 신문은 기록하기를… “에스더는 알링톤 하이츠의 한 교회 목사의 딸입니다. 주일 예배 중에 그녀는 다른 소녀와 함께 교회 파킹장에 나가 눈 속에서 놀다가 눈으로 지은 성이 무너지며 그 밑에 깔렸습니다. 그녀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하고 외쳤지만 아무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한 시간 가량이 지나서야 소녀들이 없어진 것을 알고 가족들이 찾아 나섰고 눈더미 밑에서 두 소녀들을 찾았습니다. 에스더의 친구는 구조가 되었지만 에스더는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그 가족들의 슬픔과 아픔이 어떠했을까요? 상상이 되시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의 가족들은 오직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의 좋은 소식을 의지하여 굳세게 견뎌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에스더의 아버지 목사님은 그 딸의 장례식을 집례했고, 언니는 교회 찬양팀에서 드럼을 치며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고, 오빠는 자례식에 참석한 손님들을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눈물과 슬픔 가운데 딸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에서, “거기서 주님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면, 우리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시간동안 이곳에서 열심히 살다가 가서 만나자 우리 딸..”
부활의 능력을 전하는 복음에 의지하는 것 이외에 어디에서 이러한 능력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 우리는 그 복음을 듣고 나에게 주어진 소식으로 받아들여 나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인 예수님이 우리에게 좋은 소식 되신 것에 대한 감사를 잃지 말아야합니다.
* 우리가 고난과 고통을 당할 지라도 오직 부활의 능력을 믿고 매달려야 할 것입니다. 아멘.